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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 2017. 10. 21. 17:22




저의 나쁜 버릇 중 하나는 제가 모르는 것을 잘 아는 사람을 두려워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저는 경제나 사회나 역사에 대해 빠삭한 사람들이 두려웠습니다.

그 사람들의 입에서 세일즈니, 경제성장이니, 전술이니 하는 단어들이 나올때면,

저는 치타 앞에 선 오소리같은 모습으로 굳어지고 마는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저의 몇 없는 매력이라도 굳이 꼽자면 시덥잖은 말이라도 끊임없이 주절대고 나불대는 것인데,

'그런 사람들'을 만나면 제 입은 딱 붙어 도통 움직이지를 않았습니다. 


평범해보였던 사람들이라도 CEO니, 테크니션이니, 학자니 하는 것을 알게 되면 달라 보이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저는 그것이 남들보다 훨씬 심했던 것이지요.

토끼같이 보였던 사람들도 '그런 부류'의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마치 매의 눈깔을 하고 저를 내려다보는 것 같았습니다. 

그 두려운 존재들은, 저를 눈길만으로 세상에서 가장 하찮은 존재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 경멸의 눈 앞에서 저는 곧바로 연소되어 세상에서 사라지고 재만 남아버렸던 것입니다. 


그랬던 제가 그녀를 만났던 것은 어느 화창한 겨울날이었습니다.

겨울답지 않게 화사한 날에 저는 여느 주말과 마찬가지로 근처 도서관의 공원에 앉아, 새들에게 과자를 몇 개 던져주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 풍경이 좋았습니다. 

바삭하게 부숴지는 겨울의 공기와, 

메마른 나뭇가지들에 애처롭지만 힘써서 매달려있는 나뭇가지들과,

자신이 먹고 있는 것이 사람의 토사물인지 무엇인지 전혀 모르는 - 멍청해서 안쓰럽고 안쓰럽지만 혐오스러운 비둘기들이 만들어내는 풍경 말입니다.

그래서 새들에게 새우깡을 던져주고 앉아있노라면, 저는 알 수 없는 평온감을 느꼈습니다.

그 정적인 공간에서 저보다 나은 것은 한 개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양 팔을 벤치에 걸치고 고개를 젖혀 하늘을 바라보고 있던 찰나에, 

낯선 물체가 움직이는 것을 봤습니다.


그 벤치 주변에는 저에게는 큰 평온과 즐거움을 주지만 다른 이들에겐 호감을 받지 못하는 마른 나무와 비둘기들만 있었습니다.

때문에 이 근처는 주말이 되어도 사람들이 잘 오지 않았습니다. 

그런 제 앞을 지나간 것은 다름아닌 사람이었고, 그것도 여자였습니다.

큰 눈에 커다란 눈동자, 허리까지 오는 결이 좋지 않은 생머리는 그럭저럭 봐줄 만 했습니다만은, 

촌스러운 안경과 뭉툭한 코에 울퉁불퉁한 피부, 후덕한 몸집까지 눈에 들어오고나면 누구도 미인이라고는 말해주지 않을 것 같은 그저그런 여자였습니다.

여자는 눈에 눈물을 그렁그렁 달고서 딸개진 코를 하고 제 옆 벤치에 앉았습니다.

'누군가에게 차였나보다'라고 생각하며 저는 곁눈질로 그녀를 흘긋 보고는 그대로 앉아있었습니다.

그녀는 그렇게 한참동안 코를 훌쩍이며 앉아있다가 휙 하니 일어서서 도서관 쪽으로 가버렸습니다.

그게 우리가 처음 만난 것의 다입니다.


그리고 다음주가 되었습니다. 그 여자는 또다시 제 옆 벤치에 아무말도 없이 앉아있다가 가버렸습니다.

그리고 다음주, 그 다음주, 다다음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녀는 어느새 저의 만족스러운 풍경의 일부가 되어있었습니다.

차가운 겨울공기와 메마른 가지, 제가 던져준 새우깡을 먹고있는 지저분한 비둘기들, 그리고 코를 훌쩍이는 별 볼일 없는 여자.

저는 어느새 그러한 주말 풍경에 익숙해졌고, 그 여자는 제 풍경의 즐거움을 조금도 방해하지 않았기에 저는 평온했습니다.

그렇게 평화로웠던 그 순간을 그녀의 목소리가 부수고 들어왔습니다. 

"저, 비둘기들을 참 좋아하시나봐요." 

저는 민망할 정도로 화들짝 놀랐지만, 놀람에 두근거리는 가슴을 겨우 진정시키고서 그녀에게 대답했습니다.

"네."

가벼운 침묵이 이어지려고 하자 저는 갑자기 이 공기가 불편하게 느껴졌습니다. 

"비둘기들을 보면 말이죠. 저는 안타까운 마음이 많이 들어요. 예전에는 분명 평화의 상징이였는데 언젠가부터 이 녀석들은 도시의 쓰레기 같은 취급을 받고 있잖아요. 얘들이 도시로 날아든 것도, 위생상태가 청결하지 못한것도 결국은 사람들 탓인데 말이죠. 서식지에는 도시가 들어섰고 얘들이 뒹굴던 땅과 물을 온통 화학물질로 뒤덮어버린 것도 인간인데요. 우리는 우리가 만들어낸 깔끔한 도시에서 만들어져나온 부산물을 어떻게든 외면하려고 하는 것만 같아요." 

저는 아무 말이나 되는대로 지껄여댔습니다. 

사실 저는 자연이 도시화가 되는 것이라든지, 비둘기들이 서식지를 뺏긴다든지 하는 것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제가 어떤 말을 하면 조금이라도 있어보일까 하는 궁리는 많이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장황하게 말을 푸는 습관은 그 궁리의 쓰레기같은 부산물이었지요.

어쨋든 그녀는 제가 벙어리가 아니라는 사실에 놀란듯한 표정을 지어보였습니다.

그녀는 저에게 최소한의 - 아마도 우수에 찬 저의 모습을 늘 봐왔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 호감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녀와 말을 나누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 이렇게 매주 도서관에 오시는 이유는 뭔가요?"

"아 저는 취직 준비를 하고 있어요."


서울의 한참 후미진 동네의 작은 도서관. 그리고 안경. 결코 대학교를 막 졸업한 나이로는 보이지 않는 그녀는 공시 장수생이거나 그저 오랜동안 취직을 준비하는 여자가 틀림없었습니다. 

늘 보던 풍경 때문이었을까요? 여자의 눈동자는 비둘기의 그것과 닮아있었습니다. 

그것은 저에게는 지독한 편안함을 주었습니다.

그 때부터 우리는 매주 도서관에서 마주칠 때마다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고, 그녀는 제가 늘어놓는 장광설에 웃어주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꽤 쌀쌀했던 날에 그녀와 저는 저의 낡은 자취방에서 관계를 가졌습니다. 

" Y, 우리는 연인이야?"

그녀가 물었습니다.

딱히 아니라고 할 이유를 찾지 못한 저는 짤막하게

"응"

이라고 대답했습니다.

나중에 말하기를, 그녀는 그 간결한 대답이 참 남자답고 멋있었다, 고 말하더군요. 

뭐 이랬거나 저랬거나 이 한심한 여자는 저를 좋아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우스운 일이지요. 

하지만 저같은 남자에게 퍽 어울리는 여자였습니다. 그것만으로 저는 꽤 만족했습니다. 

연인이 되었다고 뭐 그렇게 달라진 것은 없었습니다. 

우리는 매주 주말이 되면 도서관에서 함께 공부를 했고, 저는 비둘기에게 먹이를 주고, 그녀는 코를 훌쩍이고. 

모든 것이 챗바퀴가 아귀가 딱딱 맞아떨어지듯, 지난하면서도 싫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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