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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노아. 2014. 4. 21. 20:10

2007년 11월 22일 아침에 나는 아침에 눈을 떴다.

아마 꽤 쌀쌀할 때였을텐데, 햇볕이 따스하고 하늘이 청명했다. 사람들은 바쁘게 걸어가고 있었다. 무언가 반짝반짝해보였다.

참으로 이상했다.

나는 어제, 내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던 사람을 잃었는데.

해가 뜨더라.

사람들은 걷고, 일하러 갔다.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내 세상의 일부가 영원히 사라졌는데, 이 세상은 그대로였다.

그게 너무 이상했다.

그래서 한참을 그렇게 멍하니 밖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 같다.

 

할머니 장례식 내내 나는 한 번도 울지 않았다.
할머니가 죽었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할머니가 땅에 들어가서 내가 이 땅 한 삽을 퍼올려 올린 뒤에야,
웬지 모르게 너무 슬퍼서 엉엉 울었다.

그 뒤로도 한동안 멀쩡했는데, 어느날 자고 있는데 엄마가 날 흔들어 깨웠다.
멍하니 깼는데, 엄마 뿐이 아니라 아빠까지 와서 날 걱정스럽게 쳐다보며 나한테 괜찮냐고 자꾸 물어봤다. 정신없어 왜그러냐고 물으니, 내가 자면서 짐승처럼 울부짖었다고 했다.

맞벌이를 한 엄마아빠 대신 나를 17년간 키워주신 분이 바로 우리 할머니였다.

나에게는 엄마보다도 아빠보다도 그 어떤 친구보다도 마음 속으로 의지하고 사랑했던 존재였다.
매일 매일밤 할머니 방에가서 안녕히 주무시란 인사를 해야 내 하루는 끝이 났다.
그런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급작스런 암으로.

나는 내 자신이 너무 미웠다.
그 암이 자라는 동안 그걸 눈치 못챘던 내가 너무 미웠고, 고등학생이 되었다고 할머니와 좀 더 시간을 보내지 못한 내가 너무 미웠다.
할머니가 혼자 방에서 티비를 보면서 내가 찾아주지 않을 때면 얼마나 외로웠을까, 날 얼마나 기다렸을까 - 그 쓸쓸한 뒷모습을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 한 켠이 싸하다.

그래서 그 때 참 많이도 울었다.

그 때엔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았지만, 할머니 돌아가시고 1년 동안을 매일 매일 할머니 생각을 하며 울었다. 돌아가시고 한 4년 정도는, 할머니 생일과 기일에는 내가 어디에 있든 하루종일 아무것도 먹지않고 검은 옷을 입고 나혼자 긴 기도를 하곤했다. 그게 내가 잘못을 비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점점 내 기억에서조차 잊혀지지 않게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나 참 유난스러웠다.

어떻게 보면 참, 이를 악물고 슬퍼했단 느낌이다.
슬픔이 차올라서 슬퍼했다기 보다, 슬픔을 쥐어짜서 슬퍼했다는 느낌이다.

지금도 할머니 얘길 슬프게 하자면 할 수 있다. 아마 눈물 몇 방울 짜낼 수 있을 것이다.
누군가의 죽음에 관해 이야기를 들을 때, 내가 그 사람에게 공감하기 위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기억도 바로 이 기억이니까. 그래야 내가 진심어린 눈빛을 그 사람에게 전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말이다.

나는 내가 참 유난스러웠다 생각했는데,

요즘엔 그냥 내가 참 한국사람다운 한국사람이구나 싶다.

세월호 사건 때문에 온국민은 오락도 자제하고, 웃음도 자제하고, 온 세상이 그저 그 이야기로 슬퍼만 하고있다. 예능은 아예 내보낼 생각도 못하고, 무거운 드라마들도 비엔나 소세지처럼 결방되었다. 채널을 어디로 틀든 세월호 이야기 뿐이고, 별 새로울 것 없는 이야기들이 무한반복되고 있다. 내 주변 한 감수성 한다하는 사람들은 다 우울증 걸리기 반보직전이다.

세월호는 정말 슬픈 사건이다. 책임 추궁도 확실히 해야할 사건이고, 유가족들과 희생자들, 그리고 관계된 분들 모두 정말 안타깝고, 위로받아야 한다. 위로할 수 있는 방법이 있겠냐만은...

그렇지만 무언가...
이 사건에 대해 언론이며 사람들이 너무 '슬픔을 쥐어짜고' 있다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왜 이렇게까지 사람들의 시선을 한 곳에 몰아넣고 참기름 짜내듯 슬픔을 쥐어짜고 또 짜내는 지, 그리고 함께 슬퍼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 짐승 쳐다보듯 하는지, 사실 이해하기 힘들다.

한국에서 교통사고로 죽는 사람이 일년에 거의 5000여명 정도라고 한다. 한 달에 400명 꼴이다.
우리 나라가 이 정도이고, 세계로 눈을 돌리면 이건 정말 말도 안되는 스케일이다. 15초에 한명씩, 고등학교는 커녕 초등학교 문턱도 밟아보지 못한 핏덩이 아가들이 굶어서 죽어간다. 내가 지금 이 문장을 치고 있는 이 순간에도 두 명쯤은 눈을 감은 것이다.

이런 세상에 살고 있는데, 우리, 그런 것에 대해서 신경써본 적이 있는가?

차사고로 안타깝게 세상을 저버린 우리나라 사람들 400명, 하나하나 다 삶이 있었을 것이고 소중한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기아에 지쳐 스러져간 생명들에게도 부모가 있었을 것이고, 그들의 죽음 앞에서 최악의 무력감을 맛보는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 때에도 우리는 배가 고파서 먹었고, 졸려서 잤고, 심심해서 웃긴 프로를 보면서 웃었을 것이다.

세월호에 대해서 슬퍼하지 말아야한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절대 아니다.

그것은 정말 마음아픈 일이고, 세상이 참 좁은지라 몇다리만 건너면 희생자들이 다 내게도 연관되어 있더라. 못다핀 꽃송이같은 아이들, 그리고 그걸 지켜봐야만 했던 유가족들과 더더욱 가슴이 타들어갔을 실종자의 관계자들, 생각하면 정말 속상하다.

그렇지만 계속 그곳에 머물러 있을 수는 없다.
우리는 주어진 삶을 또 열심히 살아가야 하니까.
슬픔을 쥐어짜는 것은 이제 잠시 접어두고,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할 때가 아닐까.
이것은 남에게 하는 이야기라기 보다는 나 자신을 추스르고 타이르기 위해 쓰는 말이다.

내가 할머니의 죽음에 대해서 저렇게 유난스럽고 오랫동안 추모했던 것은,
나 자신에 대한 분노 때문이었다. 내 자신의 무력감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나를 위한 행동이었다. 누군가를 원망해야 했고 누군가를 벌주어야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무력함이 조금은 사라질 것 같았던 것 같다. 그 당시 나에게 그 누군가는 나 자신이었다. 누군가 다른 원망할 대상이 있었다면 나는 그 대상에게 많이 잔인했을 것 같다.

내가 그런 각종 '나만의 추모의식'에서 자유로워진 것은,
할머니가 하늘에서 이러고 있는 나를 본다면 그것을 그렇게 기뻐하지 않으시겠다는 생각이 들고부터였다. 물론 그런 생각이 들자마자, "어! 그만해야겠다." 그렇게 그만두었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천천히, 할머니가 나에게 정말 바라는 것은 내가 행복하게, 그리고 열심히 내 삶을 살아내는 것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내 안에 스며들면서 그런 각종 죄책감들과 갈 곳 없던 분노도 조금씩 사라져간 것 같다.

여전히 나는 죽음 앞에 무력하다. 하지만 그 무력하다는 것도 좀 더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모두 언젠가 죽는다.
그러나 그 뒤에 또다른 무언가가 있음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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