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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본문
일주일 전 즈음 무료한 일상의 탈출구를 찾아 나갔던 소개팅에서 한 남자를 만났다.
반듯하게 코 위에 얹어져 있는 안경 너머의 흐리멍덩한 눈을 가진 남자.
키도 보통, 평범한 회사에 다닌다는 평범한 이 남자는 기특하게도 파스타집에 예약을 해두는 정도의 성의를 보였다.
요즘 소개팅에서는 차만 마시고 땡인 경우도 많다던데 아마 소개팅을 평소 많이 하던 남자가 아니었으리라.
취미가 뭐냐 일은 어떻냐 등등의 피상적인 대화가 오고갔다.
내 아담한 키가 마음에 든다, 긴 생머리를 평소에 좋아해왔다 등등의 입발린 말을 해대는 걸로 봐서 예상은 했었는데, 바로 그 자리에서 에프터 신청을 할 줄은 몰랐다.
그런 그가 싫지 않아, 두번째 만났을 때 그가 어설프게 장미꽃 한송일 내밀었을 때 나는 담담하게 오케이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그렇게 사귀기로 한 다음 다음날,
나의 새로운 남자친구는 교통사고로 죽었다.
우리는 어떠한 유대감을 키워나갈 새 없이, 이제 조금 더 서로를 알아가려는 최소한의 의지만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소식을 듣자마자 내 눈에서는 눈물이 쏟아졌다.
나는 그 사람을 단 세 번 만났었고,
그 이전에 이 사람은 내게 존재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에게 '여자친구' 와 '남자친구'라는 타이틀을 달아준 순간, 나에게는 그의 죽음을 슬퍼해야만 하는 의무와 권리가 생긴 셈이었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흐르던 눈물이 조금 그치자 나는 마치 물에 빠진 듯한 기분이 들어 멍해졌다.
멍해졌다가 그의 흐리멍덩한 눈이 떠오르면 다시 눈물이 났다가를 몇 번 반복하다가 나는 어찌어찌 잠에 들었던 것 같다.
...
이 글을 읽고 누군가가 나에게 진짜 이런 일이 있었냐고 물어왔었다.
아님.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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